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표트르 차이콥스키 (문단 편집) === 초기 === ||<-2>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www.musicwithease.com/tchaikovsky-1874.jpg|width=100%]]}}}|| || 젊은 시절의 차이콥스키 || [[러시아]]의 우랄 지방 봇킨스크에서 출생했다. 차이콥스키의 부계는 우크라이나계로 증조부 표도르 차이카(Fyodor Chaika)가 [[표트르 대제]] 때 러시아군 장교로 [[폴타바 전투]]에 참전하고 러시아에 정착하였다. 할아버지 표트르 표도르비치 차이카는 [[상트페테르부르크]]에서 의료 훈련, 군의보조원으로 일했고, 아버지 일리야는 러시아 육군 중령, 야금학기술자연구소 산하 과학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. 아버지 일리야는 본처와의 사이에서 딸 지나이다를 남기고 젊었을 때 죽어 1833년 육군 중령으로 있을 때 재혼하였다. 어머니인 알렉산드리아는 [[프랑스인]]과 [[독일인]]의 피가 섞인 러시아 혼혈인 여성으로, 외할아버지 아시에르(Assier)는 독일계 프랑스인이었다. 아버지 일리야 페트로비치(1795 - 1880)는 정부의 탄광 공학자이자 광산 감독관으로 우랄 지방 곳곳의 광산을 전전했고, 그 때문에 가족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이곳 저곳으로 이사하면서 살았다. [[프랑스]]인 가정교사의 교육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지만, 아버지나 어머니는 차이콥스키가 별로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. 특히 아버지가 법률가로 키우려고 했다. [[1850년]]에 [[상트페테르부르크]]의 법률 학교에 입학하여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. 한편으로는 법률학교 내 합창단에 들어가서 음악 공부도 이어 나갔다. [[1859년]]에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법무성의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끊지 못하던 중 [[1860년]]에 안톤 루빈시테인(Антон Рубинштейн, [[1829년]] ~ [[1894년]])과 니콜라이 루빈시테인(Николай Рубинштейн, [[1835년]] ~ [[1881년]]) 형제가 주재한 음악교실에 입학했고, 그것이 [[1862년]]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승격되어 1기 학생이 됐다. 초반에는 [[안톤 루빈시테인]]과 절친한 사이였지만 음악적 노선의 갈등으로 결국 안톤 루빈시테인과 불화를 일으킨다. 루빈시테인 형제는 서유럽의 음악을 중시하고 소위 [[러시아]] 국민악파라 불리는 "[[러시아 5인조]]"의 음악을 수준이 낮다고 절하했다. 그런데 차이콥스키가 이 "5인조"의 음악적 성향에 접근한 작품인 "폭풍우"라는 관현악곡을 작곡하자 루빈슈타인이 격노했으며, 이것이 불화의 요인이 되었다. 결국 차이콥스키는 안톤 루빈시테인의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이 설립한 [[모스크바]]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[[상트페테르부르크]]를 떠난다. 차이콥스키는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[[밀리 발라키레프]]의 소개로 국민악파인 "[[러시아 5인조]]"와 친분을 나누지만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성향이 [[프란츠 리스트|리스트]]나 [[리하르트 바그너|바그너]]의 영향을 받아 서유럽 쪽으로 기울면서, 자신과 코드가 맞지 않았던 국민악파와 결별하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